2.수많은 '나'의 이야기15 [시] 밤 하늘 밑에서 최지현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인 밤 풀잎 향기 떠도는 드넓은 초원에 늙은 고목 하나 외로이 서있다. 시간은 허공을 느리게 배회하며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아 하늘거리는 잎새 사이사이 영원한 심연을 말 없이 가득 채운다 유수와 같은 흐름 속에서 나는 세계와 일치한다 천체의 속까지 드리워진 영원한 뿌리와의 유대는 강하게 맥박 치며 내 피를 타고돈다 2020. 12. 13. [수필] 열차에서 2: 묘한 독서 글: 최지현 전차에 올라타 빼곡이 들어찬 좌석들 한가 운데 간신히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나는, 까닭 없는, 십여 분 남짓한 공상에서 깨어난 끝에 무릎팍에 고이 모셔둔 책장을 아무렇게나 펼친다. 그러나, 본디 예상과는 달리 나는 하나도 글줄에 정신을 집중할수 없다. 머리 뒤편의 창문에서 떨어지는 빛과 음영의 조화가 내 정신을 온통 앗아가버린 것이다. 신비스러운 창공이 던져 준 이묘한 블라인드는 오른쪽 지면, 위쪽 삼분의일 지점에서 조용히 계류돼 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내 감각의 중심을 형성 하고 있는 묵지근한 사념의 후위로부터, 시선의 최전방에 문득문득 등장하는 이 명멸 하는 조각들은 차츰 중첩, 분리되고 이반하며 뒤얽히면서, 이 세상에서 눈뜬 이래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한 기하학적 패.. 2020. 12. 13. [글/사진] 전부망가지지는 않았다 서현석 작가의 「먼지극장」을 관람하고 나서 글/사진 : 이뱁새 서현석 작가는 텅 빈 미술관 구석에 천사상을 쓰러트리며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진 오늘날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했다. 『먼지극장』이라는 작품을 조성하는 그의 시선은 거시적 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에 들어선 나는 그보다 미시적인 시선에서 폐허가 된 삶을 떠올렸다. 살면서 여러 번 미끄러지기를 거듭한 나는 더는 누구에게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절망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에게라도 구원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완벽한 위로로 다가오지 않았다. 쓰러진 천사상은 내게 실패의 경험을 환기 하는 것만 같았다. 우울한 기분으로 구석에 있는 천사상을 바라보 다가 발을 조금 옮겼다. 그곳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구멍 난 곳 앞에 작은 의자가.. 2020. 12. 13. [수필] 고시원의 악몽 글: 최지현 몹시도 눈이 부신 강렬한 광채 앞에서, 흡사 면전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듯이, 나는 반쯤 굽혀진 팔을 쳐들어 눈을 가렸다. 흡사 햇볕이 내리쬐는 물가에서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바닥 없는 물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먼 발치서 내가 그토록 바라고 갈구하던 어떤 것이 보인다. 애타게 손을 뻗지만, 그 모습은 나에게서 멀어지고, 점차 사라진다. 나는 그대로 꿈 속을 헤맨다. 바람도, 별도 없는 하염없는 시간 속에서…. 문득 눈이 떠졌다. 아침이라고 느꼈다. 내 배꼽이 그렇게 소리지르고 있었기에. 뻐근한 목을 누르며 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리고 신음한다. 저절로 눈꺼풀을 치켜든 내 눈앞에는, 상체를 일으킨 내 머리에서 정면으로 네 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 2020. 12. 13.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