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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가 방을 나가지 않게 된 이유/청년체인지업 프로젝트 참가자 수기

시련과 혼돈

by 이아당 2020. 12. 13.

글: 낙원 

 

은둔을 하는 것은 실패자인가? 그것을 이겨낸다면 실패자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과정은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28년간 변호사를 준비한 사람은 실패자인가? 사업이 망한 사람은? 노숙자는? 실패의 기준은 무엇인가? 절대적인 기준이 있기는 한 걸까? 성공의 절대적인 기준도 없는 마당에?

 

사람마다 살면서 누구나 시련을 겪는다. 그 시련의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게 나한테는 그저 은둔일 뿐이다. 시련을 겪는다고 실패자는 아니지 않은가?

 

은둔을 한다, 고로 너는 실패자다 라는 말을 듣고 가소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얘길 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제넘게 남의 인생을 재단하는 인간들이 은근 깔렸구나 싶었다. 그런 권리는 당신네들이 전혀 부여 받지 않았다. 착각하지 말라. 인생에 대한 철학도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에 그저 세상의 세뇌교육에 놀아났기에 은둔을 하는 건 실패자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인생의 철학에 관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건 참, 너무나도 쉽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먼저 선수를 쳐서 상대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얼이 빠져 말이 안 나오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인가.

 

얘기를 해서 귀에 말이 들어가는 인간이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일단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판명이 났기에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 않기도 하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일일이 반응한다는 것은 무가치, 무의미하며 시간 낭비, 기력 낭비, 스트레스일 뿐이다. 더해서 그 인간들은 개선의 여지가 일절 없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괜찮다. 화는 나지만 그 인간들은 일찍이 멀리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삶은 원래 해로운 인간들이 걸리적거리는 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곳이 어디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존재한다. 세상의 이치 같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그게 변할 리는 없다. 변이 더럽다고 배출하지 못하게 구멍을 틀어막을 순 없는 것과 비슷하다.

 

내 지난 시련에는 어떤 의미나 깨달음이 있을까? 아무나 믿지 않아서 사기를 당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잘못된 부분을 보고 반면교사 삼아 남자친구가 갖춰야할 중요한 점들을 생각해본다? 지금 당장은 그것들을 찾는데 고전을 겪지만 나중에 이 경험이 값지다고 여길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의미 없는 순간들이 절대 아니었다.

 

내 모든 아픔들이 한편으론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난 그럴 수 있을까?

 

열심히 살지만 허무한, 왜 사는지 모르겠는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재연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그게 어떤 삶인지 안다. 아버지의 삶이며 내 현재 삶과 흡사하다. 난 그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걷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경로를 마음껏 이탈할 것이다. 그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목숨연명에, 삶 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래서 지금 놓인 갈림길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내게는 죽는다는 선택은 아예 없다. 나에게 죽음을 내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은 내가 정말 애잔하게 여겨진다.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죽나? 나는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다. 난 내가 소중하니까 죽을 수 없다. 한 번 태어난 거, 자연사 이전에 죽음이란 없다. 자연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이외에는 죽음에 관련한 더 이상의 생각을 금한다.

 

내 인생을 독립성 있게 비상하며 살 수 있느냐, 죽지 못해 살며 꾸역꾸역, 근근이 버티는 삶을 사느냐.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나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 밖에 없다. 지금의 삶처럼 살아있는 게 느껴지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죽지 못해 살며 꾸역꾸역, 근근이 버티는 삶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다. 성공은 두려워도 한 발짝 내 길에 내디뎌 보는 것이기도 하고 힘겨워도 전자보다 행복에 가까운 삶이다. 어차피 죽는 선택은 나에게 없으니 사는 것 뿐 인데 이왕 사는 거 행복해지고 싶지 않나? 기특함, 전율, 짜릿함, 보람, 가슴 두근거림, 내가 원하는 삶, 벅찬 감정과 가까워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내 선택에 달려있다. 물론 행복에는 대가가 따른다. 대가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날 이끌어줄 사람과 온 마음으로 가슴 통증이 느껴질 만큼 슬퍼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어머니가 다른 자식에게 신경을 쏟는 걸 보며 절실히 실감한다. 반드시 내가 나를 살려야 한다는 걸 명심한다. 그 것 밖에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날 내버려둘 뿐이다. 나만이 할 수 있다. 어릴 적의 내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달라고 말한다. 나 힘들었다고, 제발 알아달라고 살면서 처음으로 징징거려본다. 울부짖고 싶다. 그 시간을 충분히 애도하고 싶다. 예전에는 그 시간들을 지나온 내가 대견하다고 말은 했지만 속으론 대견함을 못 느꼈다. 이제부터 인정하고 싶다. 고된 여정이었고 그 시련을 이겨냈기에 나는 지금 살아있는 거라고. 당연히 목숨이 붙어있는 게 아니라 난 지금 이 자리까지 안간힘을 다해 도착한 것이다.

 

이렇듯 과거의 나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여전히 가족 구성원들에게 향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있는 게 느껴지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의 길을 간다는 건 참으로 두렵지만 이 감정 또한 받아들이면서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기를 바라고,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