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촛불하나
나의 노래방 18번은 god의 촛불 하나다. god는 초등학생 때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아이돌 가수이다. 이 곡은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그 친구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릅니다.'라는 데니 안의 짧은 나레이션 후, 윤계상의 랩으로 시작한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기만 한지 누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한건지.
태어났을 때부터 삶이 내게 준건 끝없이 이겨내야 했던 고난들뿐인걸.
그럴 때마다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물어봤지.
뭘 잘못했지?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내게만 이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내일 또 모레."
나는 사는 게 늘 힘들고 버거웠다. 성인이 되면 더는 가족의 탓을 하면 안 된다는데, 나는 노래 가사처럼 "내가 뭘 잘못했지?"하고 물어볼 때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살아있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혐오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는데,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었을 때, 아빠가 사기 결혼을 당했다며 엄마를 폭행했다고 한다. 아빠와 할머니는 엄마와 엄마의 가족들을 비난하고 무시했다. 어렸을 땐 명절이나 방학 때마다 엄마랑 외가에 가곤 했는데, 아빠와 할머니의 눈총을 받거나 몰래 가야 했다. 농촌에서 살던 나는 친가보다 서울에 있는 외가의 친척들이 더 편하고 좋았다. 같이 놀이동산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바다에 캠핑도 갔다. god를 알게 된 것도 외사촌 언니들이 god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god 노래들을 들으면 언니들과 god가 나온 라디오를 듣고, 밤새 노래를 들으며 이야기 나누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아빠는 나와 동생들도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무시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어렸을 때는 그 말이 진짜처럼 느껴졌고 정말로 버림을 받을까 봐 무서웠다. 초등학생 때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든 카네이션과 함께 풍선껌이랑 사탕을 사서 드린 적이 있다. 아빠가 금연하려고 노력하던 때여서 나름 고민해서 샀는데, 고작 이런 걸 선물이라고 주는 거냐고 말했다. 조금 더 커서는 팬시점에서 20,000원짜리 지갑을 사서 생일 선물로 드렸는데, 몇 년 동안이나 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이스크림이 200원이던 시절이었는데, 2만 원은 정말로 큰돈이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엔 아빠가 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느냐고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웠다. 그리고 내가 돈 벌어주는 기계냐며 호통을 치면서 엄마와 싸웠다. 서로 이혼을 하네 마네 하며 소리를 질렀고, 어떤 날엔 리모컨, 의자, 선풍기 같은 물건을 서로 던지기도 했다. 할머니가 싸움을 말리러 나갔다가 방에 들어와선 아빠가 가엽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나와 동생한테 이혼하면 누구랑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빠랑 살 거라고 말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엄마는 화가 나면 나를 욕하고, 때리고, 심지어 집에서 내쫓았지만,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술만 드시지 않으면 과묵했고 용돈도 많이 주었다. 둘째, 엄마는 가정주부였고, 아빠는 돈을 벌었다. 다음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몇십 번의 부부싸움이 있었고, 엄마는 몇 번 더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엄마는 나와 동생 때문에 이혼을 못 하는 거라고 말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운 건 혐오와 폭력이었다. 40대 남자 교사가 11살 남자아이의 귀싸대기를 수차례 때리는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가정통신문과 함께 사랑의 매를 나눠주었다. 전교생이 200명이 안 되는, 반이 하나씩밖에 없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왕따가 유행했다. 마을에 있던 교회 목사 딸 주위로 무리가 형성되었고 반 애들을 돌아가며 왕따를 시켰다. 나도 중학생 때까지 3번의 왕따를 당했지만, 무리에 속했을 때는 다른 친구를 따돌리는 데 가담했다. 왕따를 당했을 때 선생님에게 말을 해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친구들의 화가 풀리길, 혹은 새로운 왕따의 대상이 나타나길 바라며 혼자서 그 시간을 버텨야 했다. 집에 와서 울면 엄마는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고 왜 우느냐고 울지 말라고 소리쳤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고 가해자이기도 했다. 집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면 나는 남동생에게 욕을 했고, 엄마가 나를 때리면 나도 남동생을 때렸다. 엄마만큼 키가 자라고 난 후에는 할머니와 엄마의 폭력에 나도 폭력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엄마가 방 안에서 온종일 누워서 잠만 잤다. 처음엔 몸이 아프신가? 했는데, 밥도 안 먹고 잠을 자는 날들이 많아졌다. 엄마가 우울증인 것 같다고 아빠에게 말했는데 역시나 별일 아니라고 무시했다. 방치되었던 엄마는 어느 날부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빠 말대로 엄마가 다시 괜찮아진 건가 했는데, 엄마가 자신은 지금 화병이 난 거라고 했다.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아빠한테 요구했는데, 아빠는 바쁘다며 무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는 점점 더 망가졌고 천천히 망상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창문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옆에 가서 엄마 뭐하냐고 물으면 자동차들이 불빛을 주고받는 걸 보라며 지금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두려워하고, 어느 날은 화를 냈다. 그제야 가족들은 심각성을 느꼈다. 뒤늦게 엄마에게 병원을 같이 가보자고 했지만, 망상이 심해진 엄마는 거부했다. 할머니는 절에 찾아갔다. 점쟁이를 만나기도 하고 누가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어디의 약이 용하다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아빠는 혼자 병원에 가서 수차례 상담을 받고 오기도 했는데 엄마가 모든 것을 거부하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엄마의 망상과 폭력은 더욱 심해졌고, 타인을 해칠뻔한 일을 겪고 난 후에야 경찰과 함께 강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3번의 이상의 입원과 퇴원이 있었다. 그 말은 즉, 엄마의 망상과 치료 거부, 폭력이 수년에 걸쳐 반복되었다는 말이다. 퇴원 후 상태가 조금 호전되면 엄마는 의사의 동의 없이 약 복용을 중단했다. 가족들이 약을 먹어야 한다고 설득할수록 엄마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 엄마의 병이 서서히 악화하는걸 몇 달 동안 지켜봐야만 했다. 엄마가 자신이나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어쩔 수 없었고, 제 3자를 위협하는 수준이 되어야만 병원과의 상담하에 강제 입원을 할 수 있었다.
조현병과 관련된 범죄가 연일 뉴스에 나왔고 2017년에 정신건강 복지법이 개정되었다. 인권침해적 요소 때문에 보호자의 동의에 의한 강제 입원이 어려워졌다. 환자 본인이 병원에 스스로 찾아와야만 입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병원까지 겨우 함께 갔는데, 정신과 진료실 문 앞에서 믿었던 네가 나를 속인 거냐며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간호사에게 엄마가 이곳에 몇 번을 입원했고, 지금 망상이 심해서 진료를 거부한다고 설명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사정은 딱하지만, 법이 바뀌어서 환자 본인의 의지로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옆에 있던 아빠는 더는 못하겠다며, 진료를 안 받으면 이혼하든 뭐하든 알아서 하라고, 우리를 두고 혼자 차를 타고 떠나려고 했다. 입원에는 가족 2명의 동의가 필요해서, 나는 아빠도 설득해야 했다.
엄마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할머니가 이상한 거라고, 할머니를 데려오면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80대의 거동이 편찮으신 할머니가 병원에 왔고, 엄마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할머니의 욕을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또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된 엄마는 왜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이 입원한 거냐며, 여길 나가면 나와 아빠를 고소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퇴원 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달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약을 매일 먹고 있다. 엄마의 병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있지만, 10년 전과 비교하면 참 감사한 일이다. 엄마가 아프면서부터 가족들이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변했다. 그래도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내 삶이 슬프고 억울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주로 타인에게 나의 삶을 증명해야 하는 때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권의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입학 후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언어에 흥미가 있어서 어문계열 전공을 선택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외국 체류 경험이 있는 특기자들이 대다수였다.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기초회화 수업에서조차 C, D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흥미는 사라지고 경쟁의 압박감만 심해졌다. 위축된 나는 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타인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날들도 늘어갔다. SNS를 보니 고등학교 친구들은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 같았다. 보는 게 괴로워서 계정을 탈퇴했다.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몇몇 친구들에게만 알렸다. 엄마의 병은 호전되었다가 악화하길 반복했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학사경고를 2회 받았다. 부모님 몰래 학자금 대출을 받아 추가학기를 다녔지만, 학점 2.9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은 수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취업을 위해서는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봐야 했다. 취업 특강을 들을 때마다 학점은 3.5, 토익 점수는 800점 이상, 토익스피킹 Lv6, 한국사,컴퓨터 자격증이 기본이며 대외활동과 인턴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취업 정보를 얻기위해 가입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익명으로 서로의 스펙을 평가했다. 인서울 하위권 대학, 20대 후반 여자, 인문계열 2점대 학점은 공무원이 아니면 취업 시장에서 희망이 없다고 했다. 성적증명서에 찍힌 학점 2.9는 지울 수 없는 나의 낙인처럼 느껴졌다. 면접에 가지 않아도 어떤 질문을 받을지 예상이 되었다. "나이가 몇 살인데, 그 시간 동안 무얼 했나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네요. F학점. 당신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실제로도 27살에 취업한 소기업은 2년도 되지 않아 부도가 났다. 사장님은 출근조차 하지 않았고, 돈을 달라며 찾아온 거래처 사람들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건 사무실의 직원들이었다. 내가 회사를 나갈 땐 권고사직조차 해주려고 하지 않았고, 마지막 달 월급과 퇴직금은 임금체납소송을 통해 1년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결혼식에 갈 때마다 온전히 친구들을 축하해주지는 못했다. 마음 한켠에 비교하는 마음이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성적이 비슷하거나 내가 더 공부를 잘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친구들도 저마다의 가족 문제가 있겠지만,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은 겉모습만 볼 수 있는 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도 저런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삶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억울하면서도 죄책감이 생겼다. 부모님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만 썼지만, 부모님들이 성장한 환경을 이해하고, 나에게 해줄 수 있는 큰 노력을 해주셨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는 나는 사람들의 연락을 피하고 자취방에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청년체인지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너무 어두워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19로 취업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나는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 면접에서 지난 몇 년의 공백기를 묻는다면 고립되었던 시간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회사에 다녀보긴 했지만, 내가 가진 건 성냥 하나와 촛불 하나처럼 작고 초라한 경험 같다. 구직사이트에 올라온 사람들의 화려한 이력서에 비교하면 너무 초라하다. 촛불 하나 켠다고 어둠이 달아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왜 고립되었는가?' 질문에 관해 쓰고 있는 지금의 이 글을 지울까 말까 수백 번 망설였다. 내 안에 있는 슬픈 기억들을 토로해내서 무거웠던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작 이런 과거의 경험들이 고립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더 안 좋았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자기계발을 해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어. 너의 노력 부족이야. 핑계 대지 마.'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족, 친구, 선생님, 면접관들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사실은 나의 목소리라는 걸 알고 있다.
편견을 갖고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싫다고 했지만 나를 가장 혐오하는건 나였다. 미래의 불행한 삶을 단정하고,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것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웹진 소모임에서 각자 방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방이 독방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는데, 감옥에 갇힌 내 옆에 열쇠가 있는 그림을 그려서 선물로 주셨다. 나는 이제 그 열쇠로 마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노래 가사처럼, 작은 촛불 하나씩만 켜보려고 한다. 부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내 주위에도 다른 초 하나가 놓여 있길 바란다. 촛불이 두 개가 되고, 그 불빛으로 다른 초를 또 찾고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내 삶의 어둠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란다.
'1.내가 방을 나가지 않게 된 이유 > 청년체인지업 프로젝트 참가자 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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