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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많은 '나'의 이야기/Outside_어쩌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백엔의 사랑』을 보고

by 이아당 2020. 12. 13.


애써도 얻을 수 없는 것들에 아파하지 않기 위해

글: 이주

 

어릴 때는 뭐든 쉬웠던 것 같다. 조금만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고 그렇게 얻은 성공의 기억들이 다음을 있게 했다.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내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에서는 달랐다. 무엇을 하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당연히 존재했다. 뭐든지 잘하던 나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나는 노력하기를 관뒀다. 한참 이런 마음에 괴로울 때 내게 찾아온 영화가 있다. 그리곤 힘을 얻고 싶을 때마다 종종 꺼내 본다. 영화, 백 엔의 사랑이다.

 

 

움츠린 어깨, 구부정한 등,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대충 입은 낡은 운동복. 주인공 이치코의 모습이다. 이치코는 서른이 넘도록 일을 하지 않는 니트족이다. 이치코의 하루는 참 답답하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에는 머리카락 한 올 내비치지 않다가 느지막이 나와 동생이 만든 도시락에 훈수를 둔다. 방으로 돌아와선 조카와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 편의점으로 향하는 일상을 보낸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동생과는 자주 마찰이 일어난다. 어느 날 아침, 동생과 큰 싸움을 벌인 이치코는 돌연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결국 부모님의 도움으로 집을 얻고, 자주 가던 편의점 백 엔 생활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 편의점에는 매일 말없이 바나나만 사가는 독특한 손님이 온다. 동료직원들은 그를 바나나 맨이라고 부른다. 알고 보니 그는 이치코가 퇴근길에 늘 구경하는 체육관에서 복싱 연습을 하던 남자, 카노였다. 종종 마주쳐도 대화조차 없던 두 사람이지만, 갑작스러운 카노의 데이트 신청으로 변화가 시작되는 듯했다. 하지만 데이트 당일 왜 데이트를 신청했냐는 이치코의 물음에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다.

 

아는 사이에요? 상대 선수요. 서로 어깨를 두드려 주길래요. 멋지네요

서로 적이 아니거든. 증오하는 사이도 아니지

 

하루는 카노가 바나나값 대신 복싱 시합 티켓을 건넨다. 처음으로 복싱 시합을 보게 된 이치코는 내내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치코는 이날을 계기로 망설여 미루었던 체육관에 등록한다.

사실 이치코를 초대했던 시합은 카노의 은퇴 시합이었다. 카노는 마지막 시합 이후 마음을 잡지 못한다. 술에 취해 편의점 앞에 쓰러진 카노를 이치코가 데려가 간호하면서 둘의 동거가 시작된다. 구직에 계속 실패하는 카노는 의지해주길 바라는 이치코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결국 집을 나간다.

이치코는 더 열심히 복싱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눈에 보이는 변화가 시작된다. 새로 온 점장의 부당한 화풀이에 맞서 싸우고,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후에는 부모님의 도시락 가게를 돕는다. 동생에게 혼나면서도 일을 배우려 노력하고, 조카도 제대로 돌봐준다.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조카에게는 펀치 훈련도 시켜준다.

 

여느 때와 같이 일하던 이치코는 도시락을 사러 온 카노와 마주친다. 도망치는 카노를 따라가 붙잡은 이치코는 그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첫 시합에 초대하지만 카노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열심히 사는 인간 보는 거 질색이야. 너 말이야, 복싱 왜 시작했냐?”

서로 막 패고 또 어깨도 서로 두드려주고. 그런 모습들. 왠지 그런 걸 하고 싶더라고.”

 

 

그리고 경기 당일, 이치코는 단단히 각오를 다지며 출전한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첫 출전인 이치코에게 노련한 상대선수는 버거운 상대였다. 제대로 들어간 펀치에 녹다운당한 순간, 경기장에 찾아온 카노를 발견한다. 카노의 응원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선 공이 울릴 때까지 K.O 당하지 않고 버텨낸다.

시합이 끝나고 경기장을 나온 이치코는 자신을 기다리던 카노를 만난다. 그제야 속상함에 울음이 터진다.

 

 

이기고 싶었는데. 진짜 이기고 싶었어. 이기고 싶었어.

이겨서승자가 되고 싶었어.

한 번이라도 좋으니딱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었다고.”

 

하긴, 최고로 좋지. 승리의 맛은. 이치코, 밥 먹으러 갈까?”

 

 

복싱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이치코는 숨도 쉬고 밥도 먹으며 살고 있지만 살아있다고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치코의 모습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팠다. 이치코는 왜 그렇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치코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이 지금까지의 이치코를 만들었는지보단 이치코의 미래에 집중한다. 그래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치코를 응원하고 삶을 다시 찾아 나가는 모습에 힘을 얻게 된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라도 어느 날은 나도 이치코처럼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런 개과천선 식의 영화가 너무 흔한 소재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흔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비추어내며 특별해진다. 찌질함, 더러움, 이기적인 마음 같은 불편한 모습들이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 여과 없이 드러난다. 거기에서 깊은 공감이 시작되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집중하게 된다. 특히 이치코로 분한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이치코와 같은 상황에 있어 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절하다. 그래서인지 이치코가 사실 한 번만 이겨보고 싶었다고 말할 때, 설명되지 않은 이치코의 시간조차 공감이 되고 마음이 아팠다.

 

카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사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남자와의 사랑이 필요한 요소인지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카노에게서 좋은 점을 찾기가 어려웠고 심지어 바람까지 피우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암시도 불만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다시 본 영화에서는 카노라는 인간이 보였다. 카노는 참 서투른 사람이다. 카노에게는 소통, 사랑의 감정 같은 것들이 익숙하지가 않다. 그래서 자신조차 포기한 제게 이치코가 다가가고 헌신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치코의 열정 또한 부대낀다. 하지만 정작 눈은 이치코를 쫓는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면서도 동시에 그 앞에서 한없이 작고 한심해지는 내가 싫어진다. 그래서 내뱉는다. “열심히 사는 인간 보는 거 질색이야.”

이런 카노이기에 대회에서 지고 난 이치코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간을 겪어왔단 걸 이해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함께 나아간다.

 

한동안 포기하면 마음 편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이 말의 의미가 있는 그대로의 의미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애써도 얻을 수 없는 것들에 아파하지 않기 위한 보호복 같은 말 아닐까. 하지만 때로는 안전하다 믿은 보호복이 나와 세상을 가로막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 이치코를 떠올려보자. 아마추어 복서로 데뷔를 했을 뿐, 나이도 많고 복서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을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치코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시작한다. 시작을 해야 끝도 있고 싸웠기에 질 수도 있으니까.